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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John Dalton by Joseph Allen (1814), reproduced as the frontispiece of Roscoe's John Dalton and the Rise of Modern Chemistry, 1895 (reproduction signed Meisenbach) · Frontispiece of Henry E. Roscoe, John Dalton and the Rise of Modern Chemistry (Macmillan, London and New York, 1895), a photogravure after Joseph Allen's 1814 portrait, via Internet Archive · Public domain (book published in 1895; the painting is from 1814)

화학자 · 19세기

존 돌턴

1766–1844

주요 업적 분야

과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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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돌턴은 모든 화학 원소가 고유한 무게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화합물은 적은 수의 원자가 정수비로 결합해 만들어진다고 제안했다. 수소를 1로 놓고 기체와 그 밖의 물질의 '궁극 입자' 상대 무게를 적은 표는 1803년 10월 21일 맨체스터 문학철학회에서 읽은 논문 끝에 붙었고 1805년에 인쇄되었다. 그는 이 이론을 『화학 철학의 새 체계』(1권 1부 1808년, 2부 1810년)에서 정리했다. 토머스 톰슨은 1807년판 『화학 체계』에서 이를 소개했다. 헨리 로스코는 돌턴이 원자라는 생각 자체를 처음 내놓았다고 주장한 적은 없고 그 생각으로 화학적 결합을 설명했을 뿐이며, 초기 원자량 가운데 상당수는 거친 근삿값이었다고 지적한다.

돌턴은 1801년 10월 맨체스터 문학철학회에서 읽고 1802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두 기체를 섞으면 입자들이 서로 밀어내지 않으므로 용기에 가해지는 압력은 각 기체가 혼자 있을 때 내는 압력의 합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돌턴의 분압 법칙이라 불리는 내용이다. 같은 논문들은 액체의 증기압이 진공에서나 공기 중에서나 같다는 점과, 그가 시험한 모든 기체가 가열되면 같은 양만큼 팽창한다는 점도 보고했다. 톰슨은 게이뤼삭이 기체의 팽창에 관한 논문을 돌턴의 논문이 나오고 반년쯤 뒤에 발표했다고 전한다.

돌턴의 『기상 관측과 논고』는 켄들에서 쓰여 1790년대에 인쇄되었으며 기압계, 온도계, 습도계, 강수량, 증발, 오로라를 다루었다. 이 책에서 그는 수증기가 공기에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별개의 유체로 공기 속에 퍼져 있다고 보았고, 비는 이슬점 아래로 냉각되어 내린다고 주장했다. 로스코는 여기에서 증기에 관한 돌턴의 법칙과 원자론의 첫 싹을 본다. 그는 또 오로라가 지구 자기의 영향을 받는다고 결론지었다. 로스코는 그가 해들리의 무역풍 설명이나 드 뤽의 기압 결과 같은 앞선 연구를 모르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1794년 10월 31일 돌턴은 맨체스터 문학철학회에서 「색 시각에 관한 특이한 사실들」을 읽었는데, 이는 학회에 낸 그의 첫 논문이었다. 이 논문은 그와 그의 형, 그리고 현지 지인을 통해 문의한 메리포트의 해리스 형제 네 사람이 분홍색을 파란색으로, 어떤 초록색을 붉은색으로 보았다고 서술했다. 그는 눈의 유리체가 색을 띠고 있을지 모른다고 추측했으나, 사후 검시에서 수정체가 정상으로 확인되어 이 설명은 틀린 것으로 밝혀졌다. 이 논문은 이 증상에 대한 일반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제네바의 프레보와 로잔의 바르트만은 이를 '돌터니즘'이라 불렀다.


삶의 장면들

1812년 9월 20일 돌턴은 베르셀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부피의 기체가 결합한다는 프랑스의 학설을 '수학적인 의미에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쓰면서도 근삿값이 자주 맞아떨어지는 것에는 '놀라운 데가 있다'고 인정했다. 베르셀리우스는 10월 13일 답장에서 기체의 결합 부피에 관한 게이뤼삭의 실험이 '원자론이 옳을 개연성에 대한 가장 훌륭한 증거'로 보이며 게이뤼삭이 틀렸다고 쉽게 생각하지는 않겠다고 적었다. 헨리는 그가 이 법칙을 끝내 '진심으로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하고, 로스코와 하든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돌턴의 결론이 더 정확했다고 덧붙인다.

존경받는 편지 상대와 프랑스의 대표적 화학자 앞에서도 자신의 측정값을 고수한 모습은, 이 문제에서 외부의 압력에 따라 견해를 고치는 경향이 낮았음과 부합한다. 다만 헨리는 그가 1827년 뒤롱과 프티의 결과를 받아들여 자신의 온도 법칙을 포기했다고 전하므로, 이런 경향이 전면적이지는 않았다. 입장 수정 성향

돌턴은 호수 지방에서 이슬점을 재면서, 산비탈의 샘을 찾아 그 물을 마른 유리컵에 담고 바깥에 이슬이 맺히는지 살폈다. 이슬이 맺히면 물을 다시 데워 되풀이했고, 물이 충분히 차지 않으면 질산칼륨과 염화암모늄 가루를 넣어 식히거나 눈더미를 이용했다. 높이와 기온을 알기 위해 기압계와 작은 휴대용 온도계도 들고 다녔다. 로스코는 그가 헬벨린산에 마흔 번쯤 올랐고, 육지측량부가 잰 1,039야드가 그의 값 1,035야드와 가까웠다고 전한다.

그 자리에서 기구와 냉각 혼합물을 즉석으로 마련해 측정값을 얻은 모습은 임기응변의 재주와 부합한다. 이 서술은 돌턴 자신의 글을 전기 작가들이 인용한 것이다. 자원 활용 성향


전환점

1793년 돌턴은 1785년부터 형 조너선과 함께 학교를 운영하던 켄들을 떠나, 고프를 통해 알려져 장로교 계통에서 세운 맨체스터 아카데미의 수학·자연철학 교사가 되었다. 보장된 급여는 한 학기 80파운드였다. 그곳에서 6년을 보낸 뒤 그는 자리를 내려놓고, 자신의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한 번에 2실링을 받는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꾸렸다. 1794년에 가입한 문학철학회는 1800년 그를 서기로 선출했다. 로스코는 교사로서의 그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준 뒤 대체로 내버려 두고 자신의 계산과 실험에 몰두했다고 덧붙인다.

급여가 있는 자리를 내려놓고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꾸리며 연구할 시간을 지킨 선택은, 자신의 일과를 스스로 정하려는 강한 욕구와 부합한다. 그의 동기에 대한 서술은 그를 높이 평가하는 전기 작가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자율성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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