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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ndreas Vesalius, woodcut dated 1542 (inscribed 'AN. AET. XXVIII', age 28), attributed to John (Jan Stephan) of Calcar; Metropolitan Museum of Art, Gift of Richard Day, 1980 (1980.1001)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Drawings and Prints, accession 1980.1001 (Gift of Richard Day, 1980), impression of the portrait leaf of De humani corporis fabrica (Basel, 1543), Open Access image DP853465, downsized from 2658 x 3693 px Classified as a historical depiction: a woodcut by an unknown cutter after Calcar, and no source states it was drawn from life. · Public domain / Met Open Access (CC0); sixteenth-century woodcut, Met Open Access API reports isPublicDomain true and no rightsAndReproduction notice

해부학자 · 근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1514–1564

주요 업적 분야

과학의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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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베살리우스는 1543년 바젤에서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를 펴냈다. 요하네스 오포리누스(Johannes Oporinus)가 인쇄했고 카를 5세에게 헌정되었다. 이 책은 일곱 권으로, 뼈와 연골, 인대와 근육, 정맥과 동맥, 신경, 영양·생식 기관, 심장과 폐, 뇌와 감각기관을 다루며, 본문 옆에 큰 목판 삽화를 배치했다. 같은 해 학생용 요약본 『에피토메(Epitome)』도 나왔다. 삽화는 전통적으로 티치아노 문하의 얀 스테판 판 칼카르(Jan Stephan van Calcar)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베살리우스는 해부를 근거로 갈레노스가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의 몸을 기술했다고 주장했다. 『파브리카』에서 그는 흉골이 일곱 조각이 아니라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아래턱뼈는 하나이며, 사람에게는 기이한 그물(rete mirabile)이 없고, 신경은 속이 비어 있지 않다는 점 등을 바로잡았다. 1543년판은 심장 중격의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피가 통한다고 여전히 말했지만, 1555년 제2판에서는 감각으로 알 수 있는 한 중격을 통과하는 피는 없다고 썼다.

베살리우스는 1537년 12월 파도바 대학에서 외과학과 해부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당시 해부학은 교수가 책을 읽는 동안 이발외과의가 시신을 자르는 방식이 보통이었지만, 그는 직접 해부하며 강의했다. 1538년에는 학생용으로 큰 판형의 인쇄 도판 여섯 장 『해부학 도판 여섯 장(Tabulae anatomicae sex)』을 냈고 그림은 칼카르의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1540년에는 볼로냐에서 해부 시연을 했으며, 학생 발다자르 헤젤러(Baldasar Heseler)가 이를 노트에 기록했다.


삶의 장면들

1530년대 파리에서는 교수가 갈레노스를 읽는 동안 이발외과의가 시신을 자르는 방식으로 해부학을 가르쳤다. 베살리우스가 직접 밝힌 이야기를 전기 작가 제임스 볼(James Ball)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직접 칼을 잡고 복부 장기와 팔 근육을 체계적으로 해부했다. 파리의 교수 요하네스 귄터(Joannes Guinterius)는 1539년 베살리우스를 해부학에 '남다른 열의'를 가진 청년이라 쓰며, 함께 근육과 정맥, 동맥, 신경을 조사했다고 적었다.

교수들이 하지 않던 일을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맡은 것은 주도적 행동성과 부합한다. 주된 서술은 베살리우스 자신의 이야기를 옛 전기 작가가 전한 것이며, 귄터의 1539년 언급이 독립적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유일한 증거다. 선제적 행동력

1561년 가브리엘레 팔로피오(Gabriele Falloppio)는 베살리우스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의 오류를 바로잡는 『해부학 관찰(Observationes anatomicae)』을 냈다. 베살리우스는 마드리드에서 이에 답하는 글을 썼고, 이 글은 1564년 베네치아에서 출간되었다. 비비언 넛턴(Vivian Nutton)에 따르면 어조는 정중했다. 베살리우스는 피의 흐름을 조절하는 정맥 섬유가 있다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팔로피오의 비판을 받아들였고, 치아에 관한 설명을 매우 반겼으며, 눈꺼풀을 올리는 근육과 세 번째 귀속뼈를 다른 사람들이 발견했음을 인정하고 귀속뼈는 직접 해부로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젊은 해부학자의 정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의 발견을 인정한 것은 믿음 갱신과 부합한다. 넛턴은 이를 1555년 주석에서 우선권 문제를 조용히 처리한 방식과 대비하므로, 이것이 그의 일관된 행동 방식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입장 수정 성향


전환점

이탈리아를 떠나 궁정으로 향할 때, 베살리우스는 궁정 의사들이 자신의 책을 혹독하게 평가한 뒤 갈레노스에 관한 자신의 주석, 강의에 쓰던 갈레노스 책, 라지(Rhazes)의 『알만소르』를 더 충실히 풀어 쓴 글, 약 처방 자료를 불태웠다. 1546년의 편지에서 그는 '글쓰기를 어느 정도 자제하려는 뜻으로' 그렇게 했고 자주 후회했으며 친구들이 말렸다고 썼다. 넛턴은 팔로피오에게 보낸 답을 그가 1555년 이후 낸 유일한 출판물로 기록한다.

적대적 평가를 받은 뒤 자신의 주석을 불태운 일은 공개 논쟁에 머무는 한계가 있었음과 부합하지만, 같은 편지에서 그는 실비우스에 맞서 자신의 연구를 변호한다. 이 서술은 본인의 것이며 사건으로부터 2~3년 뒤에 쓰였다. 갈등 감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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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