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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ann Kerseboom, The Shannon Portrait of the Hon. Robert Boyle F. R. S., oil on canvas, 1689; courtesy of Science History Institute, Philadelphia (Rights: Public Domain Mark 1.0) · Science History Institute (Philadelphia) Digital Collections, "The Shannon Portrait of the Hon. Robert Boyle F. R. S. (1627-1691)", oil on canvas, 127.0 x 101.6 cm, institutional location Museum; via Wikimedia Commons "The Shannon Portrait of the Hon Robert Boyle.jpg" · Public domain (Public Domain Mark 1.0)

화학자 · 근세

로버트 보일

1627–1691

주요 업적 분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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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보일은 1658~59년경 옥스퍼드에서 로버트 후크의 도움으로 공기 펌프를 제작했고, 1659년 12월에 그 결과를 정리해 『공기의 탄성에 관한 새로운 물리-역학 실험』(1660년 출간)을 썼다. 이 책은 배기한 유리 용기 안에서 불꽃, 소리, 생물, 액체를 대상으로 한 실험을 보고하고, 흔히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되던 현상이 실제로는 공기 자체의 탄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토머스 홉스와 프란키스쿠스 리누스가 이 책을 공격했고, 보일은 1662년 재판에서 이에 답했다.

보일은 같은 책의 1662년 판에 리누스에 대한 반박문과 함께, 구부러진 유리관 속에 가둔 공기를 수은을 이용해 압축하고 팽창시킨 실험을 덧붙였다. 그는 압력과 팽창이 서로 반비례한다고 보고했다. 이런 관계는 리처드 타운리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고, 피터 앤스티는 보일이 이 관계가 한계 없이 성립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이 관계가 오늘날 보일의 법칙이라 불린다.

『회의적 화학자』(1661)에서 보일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는 카르네아데스가 등장하는 대화체를 써서,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과 화학자들의 소금·황·수은 3원리설을 모두 문제 삼았다. 그는 '원소'와 '원리'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을 뜻하는지, 실험은 무엇을 보여 주는지를 물었다. 마이클 헌터는 이 시기의 실험 논문들이 보일로 하여금 형상과 성질로 설명하는 스콜라 철학에 맞서 기계론 철학의 한 형태인 입자론(corpuscularianism)을 내세우게 했다고 덧붙인다.

보일은 1660년 11월 28일 왕립학회의 창립 모임에 참석했으며, 마이클 헌터는 그를 왕립학회가 내세운 실험 철학의 대표적 본보기라고 부른다. 그의 저서는 다른 사람들이 같은 절차를 따라 할 수 있도록 실험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1691년 유언장의 추가 조항으로 그는 런던의 한 집에서 나오는 수입을 기독교를 옹호하는 설교 시리즈인 보일 강연(Boyle Lectures)의 재원으로 지정했고, 이 강연은 1692년 리처드 벤틀리가 처음 맡았다.


삶의 장면들

보일은 산이 없는 곳에서 공기의 압력이 높이에 따라 달라지는지 시험하려고, 물을 채운 기상 유리관을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붕에서 끈으로 땅까지 내려 물이 얼마나 내려가는지 표시했는데, 그 차이는 약 1인치였다. 이틀 또는 사흘 뒤에는 바람 때문에 결과가 덜 규칙적이었고, 성당 안 회랑에서 한 재시도는 관 윗부분이 부러지는 바람에 차질을 빚었으며, 그는 이 실험에 추가 검토가 필요할 수 있다고 적었다.

이상적인 실험이 불가능할 때 대안적인 시험을 고안하고, 깨끗한 결과뿐 아니라 바람 때문에 어긋난 시도와 관이 부러져 차질을 빚은 시도까지 기록한 것은 실험을 고안하고 그 한계를 함께 적는 습관과 부합한다. 실험 성향

보일은 1684년 『인간 혈액의 자연사를 위한 기록』을 출간한 지 몇 달 안에 개정판 준비에 들어갔다. 편집자 마이클 헌터와 해리엇 나이트에 따르면, 그가 쓴 서문 초안은 이탈리아 의사 마르첼로 말피기의 반응이 계기였다고 밝히고 있으며, 조사 항목 목록은 30개에서 45개로 늘어났다. 이 개정판은 끝내 인쇄되지 않았다.

다른 의사의 반응을 받아들여 이미 출간한 책을 고쳐 쓰려 한 것은 외부 증거에 비추어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는 태도와 부합한다. 다만 편집자들은 비평가들이 이 책을 체계적이지 못하다고 평가했고 개정판이 인쇄되지 못했다는 점도 함께 기록한다. 입장 수정 성향


전환점

1645~46년 보일의 첫 집필 계획은 도덕론인 『아레톨로지(Aretology)』였고, 이후 몇 해 동안 그의 글은 과학적이기보다 경건하고 교훈적이었다. 1649년 그는 도싯 스톨브리지의 자택에 실험실을 차렸으며, 마이클 헌터에 따르면 그해 여름 이후의 글에는 실험적 지식에 대한 열정이 나타나고 이는 평생 이어졌다.

도덕적 저술에서 실험실 작업으로 방향을 바꾸고 이를 40년 동안 이어 간 것은 새로운 탐구 방향으로 이끌린 호기심과 부합한다.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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