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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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fus Porter Moody (1873-1922), 'Mary Pickford, head-and-shoulders portrait, facing front', photographic print, between 1910 and 1920;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LC-USZ62-117995); studio copyright notice 'Copyright by Moody, New York' (photographer died 1922) ·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biographical-file portrait photograph (LC-USZ62-117995; digital ID cph.3c17995; control no. 97510062), Moody, New York · Public domain

배우 · 20세기

메리 픽퍼드

1892–1979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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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메리 픽퍼드는 1909년 바이오그래프의 단편 영화로 영화 경력을 시작해, 1910년대 중반에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출연료가 높은 영화배우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미국의 연인'이라 불렸다. 영화사학자들은 픽퍼드를 클로즈업 카메라에 어울리는 보다 자연스러운 연기 양식을 개척한 배우로 평가한다. 「테스 오브 더 스톰 컨트리」(1914)는 네 개 대륙에서 상영되었고, 1917년경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영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있었다.

1919년 픽퍼드는 찰리 채플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D. W. 그리피스와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세웠다. 배우와 영화인이 자기 영화의 배급을 직접 통제하고 수익을 나눌 수 있게 하려는 배급사였다. 픽퍼드는 그보다 앞선 1916년에 이미 자신의 제작 부문을 확보했는데, 영화학자 게일린 스터들러는 이를 할리우드 스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픽퍼드는 1935년부터 경영진으로 일했고, 1956년 지분을 팔 때까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소유주로 남았다.

1927년 픽퍼드는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를 세운 36명의 창립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고, 1930년에 열린 제2회 시상식에서 첫 유성영화 「코케트」(1929)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앞서 1921년에는 영화인 구호 기금(현 모션 픽처 & 텔레비전 펀드)의 창립에 참여했고, 1932년에는 급여 공제 기부 제도인 '페이롤 플레지'를 앞장서 추진했다.


삶의 장면들

1907년 여름, 순회 극단 배우였던 열다섯 살의 글래디스 스미스는 브로드웨이 제작자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사무실을 날마다 찾아갔지만 내일 다시 오라는 말만 들었다. 세부 내용은 기록마다 다르다. 2005년 PBS 다큐멘터리는 마침내 사무실로 뛰어들어 벨라스코를 만나지 못하면 목숨이 걸렸다고 외쳤다고 전하고, 1926년 테리 램지의 영화사는 리허설 중인 무대로 뛰어들었다고 전한다. 두 기록 모두 그가 벨라스코의 극단에 들어갔다는 점은 같고, 메리 픽퍼드라는 예명도 벨라스코가 붙여 주었다.

이 일화는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기회를 만들어 낸다는, 이 프로필의 높은 주도적 행동성과 일관된다. 선제적 행동력

1918년 아돌프 주커가 도시를 비운 사이 픽퍼드는 「스텔라 마리스」 촬영에 들어갔다. 부유한 병약한 소녀와, 학대받으며 절뚝이며 걷는 고아 하녀 유니티 블레이크를 한 사람이 연기하는 작품이었고, 주커가 승인하지 않았을 배역이었다. 돌아온 주커는 분장한 채 촬영장에 있는 픽퍼드를 보고 크게 당황했으며, 픽퍼드는 자기 배역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죽는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영화는 호평을 받았고, PBS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주커는 그 연기가 픽퍼드 경력에서 '가장 놀라운' 것이었다고 인정했다.

이는 제작자가 반대했을 법한 비관습적인 배역을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이 프로필의 위험 감수 성향과 일관된다. 다만 이후 「로지타」(1922)처럼 팬들의 반응이 덜했던 시도도 있었다. 위험 감수


전환점

1915년경 픽퍼드와 어머니는 그의 영화가 파라마운트의 다른 작품까지 팔리게 하는 힘이 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16년 전국적인 화제가 된 협상 끝에 주커와 맺은 계약은 그의 이름을 건 제작 부문을 통한 수익 분배와 작품에 대한 더 큰 발언권을 보장했고, 픽퍼드는 「푸어 리틀 리치 걸」(1917) 같은 작품을 직접 고르기 시작했다. 월급을 받는 스타에서 제작자로 바뀐 이 위치는 1918년 퍼스트 내셔널을 거쳐 1919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로 이어졌다.

이는 높은 급여만이 아니라 자기 작업의 소유권과 통제권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이 프로필의 강한 자율성 욕구와 일관된다. 자율성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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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