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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upont (Aime Dupont studio), New York, about 1908; Library of Congress; cropped from the scan to remove the film border and downscaled · Studio portrait photograph of Giacomo Puccini by A. Dupont, New York, about 1908, held by the Library of Congress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Miscellaneous Items in High Demand, call number BIOG FILE - Puccini, Giacomo, 1858-1924, reproduction number LC-USZ62-107386), via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photograph copyright-registered in the United States about 1908, so published before 1931)

작곡가 · 19세기

자코모 푸치니

1858–1924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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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푸치니의 「라 보엠」(1896년 2월 1일 토리노 레조 극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지휘), 「토스카」(1900년 1월 로마), 「나비 부인」(1904년 2월 17일 밀라노 라 스칼라)은 그의 명성의 중심이 되었다. 브리태니커는 이 작품들을 그의 성숙기 오페라로 꼽으며, 대본은 주세페 자코사와 루이지 일리카가 썼다. 「나비 부인」은 초연 직후 손질을 거쳐 1904년 안에 다시 무대에 올랐다.

데이비드 벨라스코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12월 10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했고 에미 데스틴, 엔리코 카루소, 파스콸레 아마토가 주역을 맡았으며 푸치니도 참석했다. 이후 그는 한 막짜리 오페라 세 편으로 이루어진 「3부작」(뉴욕, 1918)을 썼고 「투란도트」에 착수했으나 1924년 사망할 때까지 끝내지 못했다. 이 작품은 1926년 4월 25일 라 스칼라에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쓴 마지막 음악에서 연주를 멈추었다. 결말은 프랑코 알파노가 푸치니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했다.

푸치니는 1883년 한 막짜리 오페라 「레 빌리」를 경연에 냈다. 브리태니커에 따르면 심사위원들은 이 작품을 고려하지 않았으나, 아리고 보이토를 비롯한 친구들이 비용을 대어 1884년 5월 31일 밀라노 델 베르메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출판업자 줄리오 리코르디는 판권을 사들이고 이를 2막으로 늘릴 것을 요청했으며, 새 오페라를 의뢰하고 매달 지원금도 주었다. 「에드가르」(1889, 라 스칼라)는 실패했지만, 1893년 2월 1일 토리노 레조 극장에서 초연된 「마농 레스코」로 드라이는 그의 지위가 안정되었다고 쓴다.


삶의 장면들

푸치니의 출판사를 위해 그의 전기를 쓴 아르날도 프라카롤리에 따르면, 푸치니는 「라 보엠」 마지막 막의 죽음 장면이 자신이 떠올린 음악과 맞지 않는다며 자코사에게 고쳐 쓰기를 청했다. 자코사가 세 번 고쳐 쓴 뒤에도 푸치니는 줄리오 리코르디를 찾아가 네 번째 수정을 부탁했고, 리코르디는 그의 말이 옳다고 했다. 친구인 마로티와 파그니는 푸치니가 막 전체를 서너 번씩 다시 쓰게 하기도 했다고 덧붙인다.

한 막을 네 번째로 다시 쓰게 하려고 돌아간 일은 완벽주의와 부합한다. 다만 이 기록들은 푸치니 자신의 이야기와 친구들의 기억에 의존하며, 그 부담은 대본가들이 졌다. 완벽주의

프라카롤리에 따르면 푸치니는 「투란도트」를 위해 세계 곳곳에 연락해 온갖 중국 음악을 구했고, 대영박물관은 고대 중국의 리듬과 음악을 담은 유일한 사본을 보내 주었다. 대본가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가 시나리오를 읽어 주러 왔을 때, 푸치니는 먼저 방 안에 황제의 찬가를 연주하는 중국 오르골 소리가 울리게 했다. 이 오르골은 바니 디 루카에 사는 파시니 남작의 소장품에서 빌려 온 것이었다.

오페라를 쓰기 전에 박물관 사본에서 오르골에 이르기까지 다른 음악 전통의 자료를 모은 일은 다른 음악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합한다. 이 이야기는 푸치니 주변 인물의 기록이며, 이 일화는 단일 출처에 의존한다. 호기심


전환점

「나비 부인」은 1904년 2월 17일 라 스칼라 초연에서 야유를 받았다. 드라이에 따르면 푸치니는 공연이 끝난 뒤 악보를 들고 나가 버렸고, 프라카롤리는 푸치니의 말을 인용해 그가 그날 저녁 작품을 철회하고 극장에 대관료를 돌려주었다고 쓴다. 그는 작품을 3막으로 고쳐, 2막을 둘로 나누고 술 취한 삼촌 장면을 덜어 내고 테너 파트에 새 아리아를 더해 확대했으며, 새 판은 1904년 5월 28일 브레시아 그란데 극장에서 갈채를 받았다.

실패한 지 석 달 안에 작품을 고친 일은 작품이 받아들여진 방식에 따라 작품을 바꾸려는 태도와 부합한다. 같은 대화에서 프라카롤리는 푸치니가 이 오페라를 진심이 담긴 작품이라 하고 그날 저녁의 깨진 분위기를 탓했다고 전하므로, 수정이 곧 평가를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었다. 입장 수정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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