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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known photographer; Anton Dvorák, photomechanical print of a studio portrait photograph, dated 1900 by the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Commons gives c. 1882 for the underlying photograph); BnF rights note: public domain (domaine public) ·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département Musique, Est. Dvořák 001 (photomechanical print, 'Anton Dvorák', plate p. 4), via Gallica ark:/12148/btv1b8417521d and Wikimedia Commons 'Dvorak.jpg' · Public domain

작곡가 · 19세기

안토닌 드보르자크

1841–1904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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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드보르자크는 1893년 뉴욕에서 교향곡 마단조 「신세계로부터」(작품 95, 오늘날의 번호로는 9번)를 썼고, 뉴욕 필하모닉 협회가 안톤 자이들(Anton Seidl)의 지휘로 1893년 12월 16일 초연했다. 오타카르 쇼우레크(Otakar Šourek)는 이 작품에 드보르자크가 흑인 영가와 인디언 노래에서 접한 5음 음계와 당김음 리듬이 쓰였고, 일부 주제도 같은 정신으로 직접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1870년대에 브람스는 드보르자크를 지원한 오스트리아 국가 장학금 심사위원단에 있었고, 1877년에는 베를린의 출판업자 프리츠 짐로크(Fritz Simrock)에게 드보르자크의 「모라비아 이중창」을 추천했다. 짐로크는 1878년 이 이중창과 「슬라브 무곡」 제1집을 출판했으며, 쇼우레크는 그 성공으로 드보르자크가 거의 하룻밤 사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졌다고 말한다. 1883년 런던에서 「스타바트 마테르」가 연주된 뒤에는 영국에서 자신의 작품을 지휘해 달라는 초청이 이어졌다.

드보르자크는 1892년부터 1895년까지 뉴욕 아메리카 국립음악원(National Conservatory of Music of America)의 원장을 지냈다. 설립자 지넷 서버(Jeannette Thurber)는 루빈 골드마크, 해리 T. 벌리, 윌 매리언 쿡, 윌리엄 암스 피셔를 그의 제자로 꼽는다. 그는 교향곡 외에 이곳에서 현악 사중주 바장조 작품 96 「아메리카」(1893년 6월 아이오와주 스필빌에서 작곡, 1894년 1월 1일 보스턴에서 크나이젤 사중주단이 초연)와 첼로 협주곡 작품 104(1895년 2월 9일 뉴욕에서 완성)를 썼다.

드보르자크는 야로슬라프 크바필(Jaroslav Kvapil)의 대본으로 오페라 「루살카」를 1900년 5월 19일부터 11월 27일까지 작곡했다. 이 작품은 1901년 3월 31일 프라하 국민극장에서 카렐 코바르조비츠(Karel Kovařovic)의 지휘로 초연되었고, 카렐 호프마이스터(Karel Hoffmeister)는 1924년에 이를 그의 오페라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삶의 장면들

1881년 가을 빈의 사중주단 지휘자 요제프 헬메스베르거(Josef Hellmesberger)는 드보르자크가 아직 쓰기 시작하기도 전에 새 사중주를 12월 15일에 연주하겠다고 발표했다고 쇼우레크는 전한다. 드보르자크는 11월 5일 알로이스 괴블(Alois Göbl)에게 오페라 「디미트리」를 제쳐 두고 사중주를 쓰기 시작해야 하겠다고 편지에 썼다. 쇼우레크는 자필 악보를 근거로, 드보르자크가 처음에 바장조 제1악장의 총보를 사흘(10월 7~9일) 만에 끝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버리고 다장조로 새로 시작해 4주가 채 안 되어 완성했다고 설명한다.

이미 끝낸 첫 악장을 버리고도 남이 정한 날짜에 맞춰 사중주를 내놓은 것은 빠른 실행력과 부합한다. 다만 이 서술은 자필 악보를 본 호의적인 전기 작가의 설명이며,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실행 속도

1893년 12월 16일 뉴욕 필하모닉의 「신세계로부터」 첫 연주에서 느린 악장이 끝나자 청중이 드보르자크를 불렀고, 「뮤지컬 쿠리어」는 그가 위쪽 박스석에 나타나 인사한 뒤 지휘자 안톤 자이들을 가리켰다고 전한다. 1894년 「에튀드」에 실린 뉴욕 헤럴드 기사는 드보르자크가 자이들의 느린 악장 해석을 칭찬하며 자신이 적은 빠르기 표시를 그에 맞춰 바꾸었다고 하고, 제자 해리 로위 셸리(Harry Rowe Shelley)도 1919년의 회고에서 자이들의 빠르기가 받아들여졌다고 말한다. 다만 두 기록이 전하는 빠르기말은 서로 다르다.

다른 지휘자의 빠르기를 듣고 자신의 표시를 바꾼 일은 자기 선택을 고칠 수 있는 태도와 부합한다. 다만 셸리는 수업에서는 한번 정한 견해를 바꾸지 않았다고도 회고하므로, 이는 일반 규칙이 아니라 한 맥락의 사례다. 입장 수정 성향


전환점

아버지가 음악을 계속하지 못하게 한 뒤 드보르자크는 약 1년간 푸줏간 견습생으로 일했고, 1857년 가을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들어갔다. 호프마이스터에 따르면 스승 안토닌 리만(Antonín Liehmann)이 계속 프라하행을 권했고 삼촌이 도움을 약속했으며 아버지가 허락했다. 부자는 이웃의 건초 수레를 얻어 타고 프라하로 갔다. 하도우(Hadow)는 그 전에 어린 드보르자크가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마을 악단용 폴카를 써 보았으나, 트럼펫이 이조 악기라는 점을 몰라 실패했다고 덧붙인다.

가족의 계획에 맞서 오랫동안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간 것은 끈기와 부합한다. 다만 호프마이스터는 리만과 삼촌의 역할도 같은 비중으로 전하고 폴카 이야기는 하도우의 서술에 의존하므로, 이 결정이 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다. 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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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