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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 Verkolje (I) (1650-1693), Portrait of Anthonie van Leeuwenhoek, natural philosopher and zoologist in Delft, oil on canvas, 56 x 47.5 cm, dated 1680-1686 by the Rijksmuseum, Rijksmuseum Amsterdam SK-A-957 (purchased 1879); public domain (painter died 1693); photograph released by the Rijksmuseum under CC0; saved as JPEG q85 at 1349x1600 from the 2148x2547 original · Jan Verkolje (I), oil on canvas, Rijksmuseum, Amsterdam (SK-A-957; on loan to Rijksmuseum Boerhaave, Leiden, accession P07252), via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painter d. 1693)

과학자 · 근세

안토니 판 레이우엔훅

1632–1723

주요 업적 분야

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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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레이우엔훅은 1673년부터 1723년까지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관찰한 내용을 네덜란드어 편지로 왕립학회에 보냈고, 버치의 기록에 따르면 1679/80년 1월 29일(구력) 크룬 박사의 발의로 회원에 선출되었다. 도벨에 따르면 그는 회의에 참석하러 런던에 간 적이 없으며, 1723년에는 딸이 은제 틀에 끼운 렌즈 26개가 든 함을 학회에 보냈는데, 이는 그가 1701년에 사후 학회에 남기도록 마련해 둔 것이었다.

1669년 2월 4일 홀란트 궁정법원은 수학자 게네시위스 바엔이 기하학 시험을 치른 뒤 레이우엔훅을 선서 측량사로 허가했다. 도벨은 네덜란드 국립문서보관소의 이 문서를 인용하며, 《전집》 편집자들은 이 시험을 들어 그가 '기예(arts)'에 전혀 문외한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삶의 장면들

왕립학회가 1677년 2월 그의 관찰 방법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자, 레이우엔훅은 3월 23일 자신의 특별한 현미경을 아직은 공개할 결심이 서지 않는다고 썼다. 1677년 10월 5일에는 목사와 공증인을 포함한 델프트 증인들이 모세관 속 후추물을 그가 검사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진술서를 보냈고, 증인들에게 본 것의 절반만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고 썼다. 버치는 이 진술서가 1677년 11월 1일(구력)에 낭독되었고, 로버트 훅이 두 번 실패한 뒤 11월 15일에 직접 그 생물들을 관찰했다고 기록한다.

증인들에게 수를 낮춰 적어 달라고 부탁한 점은 이 프로필의 중간 수준 분석적 엄밀성 점수와 부합하며, 기록이 엇갈리기 때문에 점수는 높지 않다. 이 경우 그는 방법을 알려 주는 대신 증언을 제출했고, 1685년 토머스 몰리뉴는 그의 추론이 때로 빗나간다고 생각했다. 분석적 엄밀성

1685년 2월 토머스 몰리뉴는 왕립학회 서기의 부탁으로 델프트에서 레이우엔훅을 방문했고, 버치가 실은 편지에서 보통 형태의 현미경 십여 개를 보았다고 보고했다. 레이우엔훅은 자기 말고는 아무도 들여다본 적 없는 다른 종류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은 보여 주지 않았다. 몰리뉴는 보여 준 렌즈가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맑다고 보았고, 레이우엔훅의 '유일한 비밀'은 더 나은 연마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공식 방문객에게 가장 좋은 기구를 보여 주지 않은 점은 이 프로필의 높은 자율성 욕구 점수와 부합한다. 이 자료에는 그의 이유가 나와 있지 않고 후대 저자들은 여러 설명을 내놓으며, 그는 1701년에 사후 학회로 보낼 렌즈함도 마련해 두었다. 자율성 욕구


전환점

1673년 4월 28일 델프트의 의사 레이니르 더 흐라프는 왕립학회 서기 헨리 올든버그에게 레이우엔훅이라는 사람이 자신이 본 어떤 것보다 뛰어난 현미경을 만들었다고 쓰고 관찰을 담은 편지를 동봉했다. 1673년 8월 15일의 답장에서 레이우엔훅은 자신이 문체가 없고 언어나 기예가 아니라 장사를 배우며 자랐으며 비난이나 반박을 달가워하지 않아 관찰을 글로 옮기는 것을 여러 번 사양했으나 더 흐라프의 청을 받아들였다고 쓰고, 자신의 관찰이 오직 자기 안의 충동과 호기심에서 나온 것임을 회원들이 기억해 달라고 청했다. 학회에 보내는 편지는 이후 50년간 이어졌다.

자신의 작업이 충동과 호기심에서 나왔다는 설명은 이 프로필의 호기심 점수와 부합하지만, 학술 단체에 보낸 첫 편지 속의 자기 서술이므로 그런 성격으로 감안해야 한다. 호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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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