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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elier E. Bieber, Hamburg (probably Leonard Berlin, 1841-1931), studio photograph of Pyotr Ilyich Tchaikovsky, 1888, an inscribed print; the Tchaikovsky Research letters pages date the Hamburg sitting to 6/18 January 1888 · Wikimedia Commons file 'Tschaikowsky EBieber 1888.jpg' (photograph by Atelier E. Bieber, Hamburg, probably Leonard Berlin; Commons credit line gives a Bergen Public Library Flickr item) · Public domain

작곡가 · 19세기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1840–1893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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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차이콥스키는 발레 세 편의 음악을 작곡했다.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 「백조의 호수」, 그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극장을 위해 쓴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와 「호두까기 인형」(1892)이다. 「백조의 호수」는 이후 공연에서 악보가 크게 삭제되고 재배열되었으며 20세기에 널리 알려진 판본은 작곡가 사후에 만들어진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세 작품 모두 지금까지 발레 레퍼토리의 중심에 남아 있다.

1874년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은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혹독하게 비판했고, 바이올린 협주곡의 헌정 대상으로 삼았던 레오폴트 아우어는 지나치게 어렵다며 연주를 거절했다. 1881년 빈에서 이 바이올린 협주곡이 연주된 뒤에는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가 적대적인 평을 썼다. 그러나 두 협주곡은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레퍼토리에 속하며, 교향곡 제4번, 제5번, 제6번(「비창」)과 「1812년 서곡」도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제6번 교향곡은 1893년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가운데 두 편은 푸시킨의 작품을 바탕으로 한다. 그가 '서정적 장면들'이라 부른 「예브게니 오네긴」은 1877~78년에 작곡되어 1879년 3월 모스크바 음악원 학생들이 처음으로 전막을 무대에 올렸고, 첫 전문 공연은 1881년 1월 볼쇼이 극장에서 열렸다. 「스페이드의 여왕」은 그가 1890년 피렌체에서 44일 만에 쓴 뒤 같은 해 12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삶의 장면들

187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차이콥스키는 새로 쓴 피아노 협주곡을 니콜라이 루빈시테인과 니콜라이 후베르트 앞에서 연주했다. 연주 기교에 관한 조언을 구하려는 자리였다. 3년 뒤 나데즈다 폰 메크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루빈시테인은 이 작품을 혹독하게 비난하며 고쳐 오면 연주해 주겠다고 했고, 차이콥스키는 한 음도 바꾸지 않겠다고 답했다. 그는 작품을 그대로 출판하고 한스 폰 뷜로에게 헌정했으며, 뷜로는 1875년 10월 보스턴에서 이 곡을 초연했다. 차이콥스키는 훗날 1879년과 1889년경에 스스로 수정을 가했다.

이 일화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권위 있는 피아니스트의 평가에 맞서 자신의 판단을 지킨 모습으로, 이 프로필의 독립적 사고와 어울린다. 다만 이후 스스로 수정한 점으로 보아 그가 이 협주곡을 고칠 수 없는 작품으로 여긴 것은 아니다. 독립적 사고

차이콥스키는 초기 작품 여러 편의 악보를 파기했다. 교향적 환상곡 「운명」은 1869년 초연 전에 몇 마디를 삭제했고 이후 총보를 없앴다. 오페라 「운디나」는 일부를 다른 작품에 재사용한 뒤 총보를 없앴으며, 첫 오페라 「보예보다」도 대부분의 총보를 파기했다. 1891년에는 이후에 쓴 같은 제목의 교향적 발라드 「보예보다」를 연주회에서 듣고 악보를 찢어 버렸다. 「운명」과 이 발라드, 그리고 오페라 「보예보다」의 대부분은 작곡가 사후에 주로 남아 있던 관현악 파트보를 바탕으로 복원되었고, 「운디나」는 일부 발췌곡만 전한다.

이러한 모습은 이 프로필의 완벽주의와 어울리며, 원본이 사라졌다는 점이 그 대가로 드러난다. 다만 「운명」의 경우 발라키레프의 비판 때문인지 작품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서인지는 차이콥스키 리서치도 분명히 말하지 못한다. 완벽주의


전환점

차이콥스키는 자신이 지휘를 할 수 없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고, 1886년 10월에는 폰 메크에게 지휘대를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떨린다고 썼다. 그는 1886년 12월 첫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직접 이끌었고, 1887년 1월 31일(구력 19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개작한 오페라 「체레비츠키」의 초연을 지휘했다. 1887년이 가기 전에 첫 유럽 지휘 순회를 떠났으며, 이후 6년 동안 프라하, 파리, 런던에서 자신의 곡을 지휘했고 1891년에는 뉴욕에 새로 문을 연 뮤직 홀(훗날 카네기 홀)의 개관 주간에도 출연했다.

스스로 밝힌 망설임이 새로운 공적 역할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이 변화는 이 프로필의 적응력을 보여 주는 사례다. 어려움은 본인이 직접 말한 내용이며, 1891년 그를 초청한 월터 담로시는 지휘가 그를 몹시 지치게 했지만 연주자들이 그의 의도를 열심히 따랐다고 적었다. 적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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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