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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go Erfurth, 1917; Kupferstich-Kabinett,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 (via Deutsche Digitale Bibliothek / Wikimedia Commons) · Hugo Erfurth, "Bildnis Käthe Kollwitz", 1917, photograph 29.4 x 24.3 cm, Kupferstich-Kabinett, Staatliche Kunstsammlungen Dresden, via Deutsche Digitale Bibliothek and Wikimedia Commons file "1917 Foto Käthe Kollwitz.png" (original 565 x 682 px; converted PNG to JPEG at the same size, not upscaled) · Public domain (Hugo Erfurth died 1948; published before 1 January 1931, so public domain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author term has expired in the country of origin; Commons template PD-old-auto-expired|1948)

예술가 · 20세기

케테 콜비츠

1867–1945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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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콜비츠는 1893년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들』 초연을 본 뒤 석판화 3점과 에칭 3점으로 이루어진 연작 「직조공 봉기」를 시작해 1897년에 완성했다. 이 연작은 1898년 대베를린 미술전시회에 출품되어 그녀의 출세작이 되었고, 심사위원단이 메달 수여를 제안했으나 황제 빌헬름 2세가 이를 거부했다. ARTinWORDS에 따르면 이 연작은 1844년의 실제 봉기나 희곡의 줄거리가 아니라 당대를 배경으로 한 가상의 봉기를 그린 것이다.

「농민전쟁」은 1902년부터 1908년까지 제작한 에칭 7점의 연작으로, 1524~25년 농민전쟁을 다룬 빌헬름 치머만의 역사서에서 영감을 얻었다. 쾰른 케테 콜비츠 미술관에 따르면 그녀는 처음에 이 연작을 컬러 석판화로 구상했으며, 1904년 신청해 드레스덴의 역사미술협회로부터 제작 지원을 받았다. 1907년에는 빌라 로마나 상을 받았다. 『아트 인 아메리카』는 이 연작을 모든 매체를 통틀어 그녀의 가장 위대한 작업이라고 평가한다.

콜비츠는 1920년대 초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판화에 자극받아 목판화를 시작한 뒤, 7점의 목판화 연작 「전쟁」을 만들었다. 쾰른 케테 콜비츠 미술관은 이 연작을 그녀가 제1차 세계대전 중에 겪고 깨달은 바를 다룬 작업으로 설명한다. 『아트 인 아메리카』에 따르면 7점 가운데 5점이 자식을 잃은 부모를 다룬다.

「슬퍼하는 부모」는 무릎 꿇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표현한 화강암 조각 한 쌍으로, 1932년 아들 페터가 묻힌 벨기에 디크스마위더 인근 로게펠트 전몰자 묘지에 세워졌다. 이 묘지는 훗날 블라슬로 묘지로 통합되면서 조각도 함께 옮겨졌다. 그녀는 1914년부터 기념비를 구상했고 1919년에 첫 구상을 중단한 뒤 1924년 새 구상을 마련했다. 화강암 조각은 아우구스트 라데스와 프리츠 디더리히가 그녀의 석고 모형을 따라 제작했다.

콜비츠는 1937~38년에 작은 조각 「피에타(죽은 아들을 안은 어머니)」를 만들었다. 베를린 케테 콜비츠 미술관은 조각가 하랄트 하케(Harald Haacke)가 만든 확대 복제본이 베를린 노이에 바헤(Neue Wache)에 서 있다고 기록하며, 원작은 이 시기에 만든 작은 조각 세 점에 속하는 말년의 작품이다.


삶의 장면들

1909년 9월 콜비츠는 어머니와 죽은 아이를 표현한 첫 다인물 조각을 시작하고, 첫 결과물을 뮌헨 시절부터 알던 조각가 알렉산더 오플러에게 보여 주었다. ARTinWORDS에 따르면 그는 작품의 구성이 허술하다고 지적했고, 이것이 그녀의 야심을 자극했다. 그녀는 이미 1904년에 파리 아카데미 쥘리앙의 조각 수업을 두 달간 들었고 로댕의 작업실도 방문한 바 있었다.

미완성 작품을 비판적인 동료 조각가에게 보여 준 일과 몇 해 전 수업을 들으며 기술을 익힌 일은 새로운 매체를 숙달하려는 강한 의욕과 부합한다. 숙련 지향

동시대 비평가 알프레트 쿤은 「농민전쟁」의 첫 장면인 쟁기질 판화에 쟁기를 모는 여성이 있는 초기 버전이 있었다고 기록한다. 1906년 판에서는 그 여성이 빠지고 멍에를 메고 버티는 두 남자만 남았다. 『아트 인 아메리카』의 비평가는 또 다른 판화 「검은 안나」를 여러 번 고쳤고, 초기의 하늘을 나는 나체상을 땅에 발을 디딘 인물로 바꾸었다고 덧붙인다.

여러 단계의 판을 거치며 한 인물을 빼고 다른 인물을 다시 그린 일은 구도에 대한 완벽주의적 태도와 부합한다. 다만 출처들은 변경 사실만 설명할 뿐 그녀가 밝힌 이유는 전하지 않는다. 완벽주의


전환점

1920년경 콜비츠는 에른스트 바를라흐의 목판화에 감명받아, 20년 넘게 주로 에칭과 석판화로 작업해 온 뒤 첫 목판화 가운데 하나인 1920년의 추모 판화를 만들었다. 『아트 인 아메리카』는 이 매체가 직접적인 표현을 원하던 그녀에게 더 잘 맞았고 그녀가 에칭을 늘 더디고 기술적이라고 여겼다고 설명한다. 목판화는 연작 「전쟁」의 매체가 되었다.

20년이 지난 뒤 다른 작가의 작업을 보고 주된 매체를 바꾼 일은 기법을 새롭게 시도하려는 태도와 부합한다. 실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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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