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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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A. Jensen, Portrait of the Scientist Hans Christian Ørsted, 1832-1833, oil on canvas, Statens Museum for Kunst (KMS8176), public domain; downscaled from the SMK Open image · Statens Museum for Kunst (SMK, National Gallery of Denmark), SMK Open record KMS8176 -- Christian Albrecht Jensen (1792-1870), 'Portrait of the Scientist Hans Christian Ørsted' (also catalogued as 'Portrait of the Physicist Hans Christian Ørsted'), 1832-1833, oil on canvas, 678 x 510 mm, painted during the sitter's lifetime and exhibited at Charlottenborg in 1833; the museum's open API record states that the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and carries the Public Domain Mark 1.0; native image 5214 x 7015 pixels (16.2 MB JPEG), downscaled once to 892 x 1200 (never upscaled, no cropping). · Public domain (SMK Open: Public Domain Mark 1.0; painter C. A. Jensen died 1870)

물리학자 · 19세기

한스 크리스티안 외르스테드

1777–1851

주요 업적 분야

과학역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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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1820년 강의 중의 시연에서 처음 희미한 현상을 관찰한 외르스테드는 그해 7월 훨씬 강한 전지로 실험을 되풀이해, 도선에 흐르는 전류가 가까이 둔 나침반 바늘을 움직인다는 것을 보였고 그 결과를 1820년 7월 21일자 4쪽짜리 라틴어 소책자로 발표했다. 몇 달 안에 파리의 아라고, 앙페르, 비오와 사바르가 이를 재현하고 확장했으며, 이후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연구도 이 발견이 밝힌 전기와 자기의 연결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덴마크의 과학 교육을 세우는 데에도 기여했다. 1824년 자연과학보급협회를 세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끌었고, 1829년에는 오늘날 덴마크 공과대학교(DTU)가 된 폴리테크닉 학교의 설립에 참여해 1851년까지 초대 원장을 맡았다.

화학에서는 1820년 후추에서 알칼로이드인 피페린을 얻었고 1825년에는 금속 알루미늄을 만들었다. 또한 1817년부터 1845년까지 액체와 기체의 압축을 측정했는데, 용기 안팎의 압력이 같아지도록 설계를 고친 압축계(피에조미터)를 사용했으며, 물질의 상태가 바뀌기 전까지는 압축이 가해진 힘에 비례한다고 결론지었다.


삶의 장면들

강의 중 바늘이 희미하게 움직인 뒤 외르스테드는 약 석 달 동안 이 현상을 다시 실험하지 않았다. 3인칭으로 쓴 그의 글은 그 이유로 효과가 미약하고 혼란스러웠던 점과, 친구 리터를 비롯한 앞선 철학자들의 오류에 대한 기억을 들 수 있다고 적는다. 1820년 7월 그는 훨씬 큰 전지로 실험을 재개해 여섯 명의 관찰자를 증인으로 세우고, 도선의 거리와 방향이 바늘의 편향에 미치는 영향을 길게 측정한 뒤에야 결과를 발표했다.

미약한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신중하게 검증하는 태도와 일치한다. 분석적 엄밀성

1823년 영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인과 노동자에게 자연과학을 가르치는 기관들을 둘러본 외르스테드는 장인, 농민, 산업 종사자와 경영자에게 자연과학 지식을 퍼뜨릴 덴마크의 협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1824년 자연과학보급협회를 세웠고, 덴마크 인명사전에 따르면 죽을 때까지 이 협회를 이끌며 많은 시간을 쏟았다. 미국물리학회는 그가 과학을 대중이 접할 수 있게 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덧붙인다.

연구실 밖의 사람들에게 과학을 전하려는 동기와 일치한다. 영향 창출 동기


전환점

1802~1804년 파리 유학 중 독일 자연철학자들을 열렬히 따르던 외르스테드는 친구 요한 리터를 나폴레옹이 내건 갈바니 전기 분야의 발견상 후보로 밀었지만, 그 발견은 끝내 입증되지 못했다. 그는 프랑스 학술지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고, 코펜하겐에 돌아왔을 때는 판단보다 열정이 앞서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따라다녔다. 덴마크 인명사전에 따르면 그는 리터의 결과 상당수가 상상의 산물임을 깨달았고, 그 뒤로는 적어도 어느 정도의 증거가 생길 때까지 자신의 철학적 생각을 억제했다.

공개적인 실패 뒤에 증거의 기준을 높이는 태도와 일치한다. 입장 수정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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