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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isco de Goya y Lucientes, self-portrait drawing in red chalk, ca. 1797-9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Bequest of Walter C. Baker, 1971 (1972.118.295); Open Access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Drawings and Prints, accession 1972.118.295 (Bequest of Walter C. Baker, 1971), Open Access record (Met collection API objectID 334315): 'Self-Portrait; wearing a top hat facing left within a drawn frame (recto); two studies of his face (verso)', red chalk on laid paper, ca. 1797-98; image DP800146 downsized from 2592x3605 to 1150x1600 · CC0 1.0 / Public Domain Dedication (The Met Open Access; Met API isPublicDomain: true, empty rightsAndReproduction field; Goya died 1828)

화가 · 근세

프란시스코 데 고야

1746–1828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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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고야는 1786년 국왕의 화가가 되었고, 1789년 4월 25일 왕명으로 궁정 화가에, 1799년 10월 31일 연봉 5만 레알의 수석 궁정 화가에 임명되었다. 1799~1800년에 그린 「카를로스 4세의 가족」은 현재 프라도 미술관에 있으며, 화가 자신이 캔버스 뒤에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고야의 『로스 카프리초스』는 당시의 악덕과 미신, 사회 관습을 풍자한 에칭과 애쿼틴트 판화 80점 연작이다. 초기 판본은 1799년 1월부터 판매되었고, 1803년 10월 9일 고야는 동판 80장과 인쇄본 240질을 왕립 판화 인쇄국(Real Calcografia)에 넘겼으며, 왕실은 그의 아들에게 연 1만 2천 레알의 연금을 주었다.

고야는 푸에르타 델 솔 광장의 시가전과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총살 장면을 담은 『1808년 5월 2일』과 『1808년 5월 3일』을 실물 크기의 한 쌍으로 그렸다. 또 1810년부터 프랑스 침공을 다룬 80여 점의 에칭 『전쟁의 참화』를 제작했는데, 생전에는 시험 인쇄본 몇 점만 찍었고 연작은 1863년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가 처음 출간했다.

고야는 『투우술』 연작 33점을 에칭으로 제작해 1815년에 한정 부수를 인쇄했고, 1825년 보르도에서는 골롱(Gaulon)이 약 300부를 찍은 대형 석판화 『보르도의 투우』 네 점을 그렸다. 마드리드 교외의 자택 벽에 그린 벽화도 남겼는데, 이 그림들은 이후 프라도 미술관으로 옮겨졌다.


삶의 장면들

1781년 사라고사의 필라르 성당 프레스코를 그리던 고야는 자신의 밑그림을 처남 프란시스코 바예우에게 검토받게 하려는 공사 위원회의 뜻에 서면 진정서로 맞섰다. 그는 바예우의 '단순한 집행자이자 고용된 종속자'가 되는 것을 거부했고, 비판은 '공인된 미술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란시스코 사파테르에 따르면, 카르투시오회 수도원장 펠릭스 살세도가 편지를 보낸 뒤 그는 4월 6일 바예우와 합의해 새 밑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다른 화가의 종속자로 일하기를 서면으로 거부하면서도 나중에 타협을 받아들인 모습은, 협력 관계 안에서 유지된 강한 자율 욕구와 일치한다. 자율성 욕구

1824년 5월 30일 페르난도 7세는 78세의 고야에게 플롬비에르 온천 요양을 위한 6개월 휴가를 허락했다. 고야는 프랑스어를 하지 못한 채 혼자 보르도로 가서 시인 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의 집에서 사흘을 머문 뒤 파리로 떠났다. 모라틴은 6월 27일 편지에서 고야가 '세상을 몹시 보고 싶어 한다'고 썼으며, 라퐁은 고야가 플롬비에르에는 가지 않고 프랑스 회화를 살펴보는 데 그 체류를 썼다고 전한다.

그 나이에 홀로 파리로 가서 동시대 프랑스 회화를 보려 한 것은 강한 호기심과 일치한다. 다만 사료는 여행 사실만 전할 뿐 그가 본 것에 대한 본인의 논평은 전하지 않는다. 호기심


전환점

고야의 1824년 휴가는 1825년 1월에 연장되었고, 1826년 6월 17일 페르난도 7세는 그에게 연봉 5만 레알 전액을 받는 퇴직과 프랑스로 돌아갈 허가를 내렸다. 그는 보르도에 정착해 석판화와 상아 세밀화를 시작했고, 1828년 4월 16일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70대 후반에 보르도로 옮겨 두 가지 새로운 매체를 시작한 것은, 경력 후반까지 이어진 실험 정신과 일치한다. 실험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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