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Ins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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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graph captioned 'Edwin Powell Hubble -- Awarded Rhodes Scholarship from Illinois', The Cap and Gown 1910, University of Chicago, p. 87; photographer not credited · The Cap and Gown 1910 (University of Chicago yearbook, Chicago, 1910), p. 87, via Internet Archive (capgown1910univ) · Public domain (published in the United States in 1910)

천문학자 · 20세기

에드윈 허블

1889–1953

주요 업적 분야

과학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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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특성


주요 업적

1923~24년 허블은 마운트 윌슨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안드로메다 성운에서 세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냈고, 곧이어 M33과 NGC 6822에서도 발견했다. 이 별들의 주기와 밝기로부터 1929년 논문에서 안드로메다까지의 거리를 약 90만 광년으로 구했는데, 이는 우리은하 바깥에 있는 거리였고 나선 성운이 별개의 은하인지를 둘러싼 오랜 논쟁을 사실상 끝냈다. 이후 연구에서 그의 거리 척도는 너무 작았던 것으로 드러나, 안드로메다까지의 실제 거리는 두 배가량이었다.

1929년 허블은 은하까지의 거리를 (주로 베스토 슬라이퍼가 측정한) 적색편이와 대조해,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더 빠르게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그 비율이 약 500km/s/Mpc임을 보고했다. 1931년부터는 더 희미한 은하를 측정한 밀턴 휴메이슨과 함께 이 관계를 넓혀 갔다. 이 관계는 팽창하는 우주 모형의 관측적 토대가 되었다. 다만 허블 자신은 '겉보기' 속도라는 표현을 쓰며 해석을 열어 두었고, 조르주 르메트르가 1927년에 이미 비슷한 관계를 도출해 팽창률을 추정했기 때문에 공로를 어떻게 나눌지는 지금도 논의된다.

1926년 허블은 은하를 타원 은하, 나선 은하, 막대 나선 은하, 불규칙 은하로 나누는 분류 체계를 제안했다. 이를 요약한 '소리굽쇠' 도표는 1936년 저서 『성운의 세계』에 실렸고, 허블이 세상을 떠난 뒤 앨런 샌디지가 이 체계를 완성했다. 허블 분류는 지금도 은하의 모양을 설명하는 표준적인 출발점으로 쓰인다.


삶의 장면들

1920년대 마운트 윌슨의 동료 아드리안 판 마넌은 나선 성운의 회전을 측정했다고 보고했는데, 성운이 멀리 있다면 이는 불가능한 속도를 뜻하는 값이었다. 미국물리학회(AIP)의 역사 자료에 따르면, 허블은 먼저 다른 관측자들이 판 마넌의 결과를 뒷받침했다는 주장을 사적인 자리에서 반박한 뒤, 네 개의 성운을 직접 다시 측정해 판 마넌의 수치에 체계적 오차가 있음을 보였다. 이후 판 마넌은 자신의 운동 측정값을 '유보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짧은 글을 실었는데, 이 자료는 그 형식이 허블 및 학술지 편집자와 협의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일화는 동료의 자료를 공개적으로 반박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도, 정면충돌 대신 기록이 제시되는 방식을 협의해 갈등을 정리했다는 해석과 어울린다. 갈등 감내

허블의 1926년 은하 분류 논문에는 크누트 룬드마르크가 거의 같은 시기에 내놓은 분류보다 자신의 것이 먼저라고 주장하는 각주가 있다. 앨런 샌디지는 허블이 좀처럼 공개하지 않았던 불만 가운데 일부가 근거 없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천문학자 데이비드 블록이 인용한 1930년 8월 21일자 빌럼 더 시터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허블은 속도-거리 관계의 '정식화, 검증, 확인'이 마운트 윌슨의 기여이며 그렇게 인정받는 일을 '깊이 걱정한다'고 썼다.

이 두 일화는 선취권과 공로 인정에 대한 강한 관심과 어울린다. 1929년 논문에서 앞선 연구를 인용하지 않은 것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며, 이 해석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경쟁 성향


전환점

허블은 옥스퍼드에서 3년을 보낸 뒤 1913년 켄터키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지만, 오스터브록 등에 따르면 실제로 변호사로 일한 기록은 없다. 그는 인디애나주 뉴올버니의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와 물리를 가르치고 농구부를 지도했다. 1914년 시카고 대학의 은사 포리스트 몰턴에게 대학원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편지를 썼고, 여키스 천문대는 그에게 근무 장학금을 제안했다. 그는 훗날 '법을 때려치우고 천문학을 택했다'고 말하며, 이류나 삼류에 그친다 해도 중요한 것은 천문학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전환은 방향을 바꾸기 위해 스스로 나선 사례를 보여 준다. 천문학으로의 이동은 그 자신의 요청에서 비롯되었고, 이미 자격을 갖춘 직업의 안정을 일부 포기하는 일이었다. 선제적 행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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