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Inside
← 전체 인물 보기

Photo: Rubén Ortega, 23 October 2015, CC BY-SA 4.0, cropped and downscaled from the original · Wikimedia Commons, 'Premios Princesa de Asturias 2015 5.JPG' -- photograph credited 'Own work' to Ruben Ortega (EXIF author 'Ruben Ortega Vega', EXIF copyright 'Ruben Ortega'; Canon EOS 1100D), taken 23 October 2015 at the Princess of Asturias Awards ceremony in Oviedo, where Coppola was the 2015 laureate for the Arts (Commons structured data depicts Francis Ford Coppola; the award is confirmed by the Foundation's own page); the copyright holder publishes it under CC BY-SA 4.0 and asks for the credit 'Rubén Ortega; CC-BY-SA' near the image; no restriction template. Original 4272 x 2848 pixels; a 4:5 region (2000 x 2500 pixels) around his head and shoulders was cropped from it, excluding the neighbouring sitters, and downscaled once to 960 x 1200 (never upscaled). · CC BY-SA 4.0

영화감독 · 현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b. 1939

주요 업적 분야

예술문화혁신

아직 성격 매칭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 기록된 근거가 성격 모델 전체를 다루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 페이지의 다른 모든 내용은 자유롭게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핵심 특성


주요 업적

그는 『대부』(1972)를 연출하고 마리오 푸조와 함께 각색했다. 이 영화는 작품상, 남우주연상, 각색상을 받았으며 각색상은 코폴라와 푸조가 공동 수상했다. 속편 『대부 2』(1974)는 오스카 6개 부문을 받았고, 그중 세 개는 제작자, 감독, 공동 각본가로서 코폴라의 몫이었다. 1970년 『패튼』의 각본상까지 더해 그는 아카데미상을 다섯 번 받았다.

1974년에는 감시 전문가를 다룬 『컨버세이션』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1979년에는 조지프 콘래드의 『어둠의 심연』을 베트남전으로 옮겨 온 『지옥의 묵시록』을 내놓았다. 촬영에 238일이 걸린 이 영화도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했으며, 브리태니커는 이 작품을 대체로 '결함 있는 걸작'으로 평가한다고 쓴다.

1969년 조지 루커스와 함께 아메리칸 조에트로프를 세웠다. 젊고 이름 없는 창작자들이 개인적인 영화를 만들도록 북돋는 회사였다. 브리태니커는 1970년대 그의 활동을 할리우드의 제작·배급 방식에 맞서는 대안을 만들려던 시도로 설명하며, 아카데미는 2010년 아메리칸 조에트로프를 세우고 『블랙 스탤리언』에서 『굿 셰퍼드』에 이르는 영화를 후원한 공로로 그에게 어빙 G. 솔버그 기념상을 수여했다.


삶의 장면들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비가 계획했던 1,200만 달러에서 3,150만 달러 가까이로 불어나자, 코폴라는 자신의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초과분을 메웠다. AFI 카탈로그가 당시 보도를 정리해 전하는 내용이다. 프레미엄 임페리얼 수상자 소개에는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아 번 돈과 가진 재산을 모두 들고 은행에 갔다는 그의 말이 실려 있다.

외부 지원이 모자랄 때 자기 재산을 걸고서라도 작품을 밀고 가려는 태도와 일치한다. 위험 감수

월터 머치에 따르면 코폴라는 『대부』의 결혼식 장면이나 『컨버세이션』의 첫 장면 같은 대목을 다큐멘터리처럼 찍었다. 배우들을 장면 속으로 던져 넣고, 때로는 즉흥을 허락하며, 카메라 여러 대로 담았다. 『컨버세이션』을 비롯한 작품들에서는 테이크를 15번, 20번까지 이어 가며, 뻔한 연기를 지나친 배우들에게서 다른 데 없는 무언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촬영 범위를 미리 못 박기보다 우연한 발견의 여지를 남겨 두는 작업 방식과 일치한다. 실험 성향


전환점

1981년 코폴라는 할리우드에 있던 자신의 조에트로프 스튜디오 스테이지에서 『원 프롬 더 하트』를 찍었다. 그가 '전자 영화(electronic cinema)'라 부른 방식을 썼고, 해외 투자자들이 빠지자 사비를 투입했다. 1982년 1월 파라마운트가 개봉을 막자 그는 조에트로프가 파라마운트와의 관계를 끝낸다고 밝히고 직접 배급을 추진했다. 약 2,500만 달러가 든 이 영화가 1,000만 달러도 벌지 못하면서 조에트로프는 파산했다.

스튜디오의 재정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도 제작과 배급의 통제권을 쥐려는 성향과 일치한다. 자율성 욕구


비슷한 인물

전체적인 프로필이 이 사람과 닮은 사람들이에요.

반대 프로필

경쟁 상대가 아니라, 살펴볼 만한 다른 프로필 형태예요.


출처